제목이 과격하네.
하지만 (적어도 한편으론)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쓰면 "한글이 훌륭한 표음문자라는 믿음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우리말"

한글날 쓴 글을 조금 확장해서 맞춤법에 집중하여 써 보려 한다.

사고와 언어와 글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이것을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린다. 규격화된 대량 교육이 실시되는 사회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대부분의 통로는 책이며, 책이란 문자화된 언어의 나열이다.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얻는 정보조차 글로 전달된다. 매체->대중의 경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개인 간의 정보 전달조차 글로 전달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메일,메신저,문자전송). [갑의 사고]->말->글->말->[을의 사고]로 정보가 전달되는 체계를 무한히 반복하면서 사고, 언어, 표기는 조금씩 변해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 한국어(우리말)
우리가 사용하는 표기 = 한글

사고와 언어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한국어와 한글 사이의 간극도 크다. 지방마다, 개인마다, 같은 글자조차 각자 다르게 발음하는 현상과 제대로 표기해낼 수 없는 발음들을 생각해보면 그 간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한국어(우리말)를 그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라고 정의해버리면 도무지 통일성을 가질 수 없기에 소위 '표준말'의 규정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어문규정'이라 하여 네 가지의 분류를 두고 있다.
  1. 한글 맞춤법 (글을 쓸 때 어떤 낱자를 어떻게 나열할 것인가에 관한 규정)
  2. 표준어 규정 (말에 대한 규정. 어떤 단어가 올바른 단어인지를 표시하는 규정)
  3. 외래어 표기법 (외국에서 들여와서 사용하는 단어들의 표기 규정)
  4. 로마자 표기법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

이중 한글 맞춤법이 글에 관련된 것이고, 표준어 규정이 말에 관련된 것이다. 외래어/로마자는 표기(글)와 관련되어 있으나 이 글의 주제와 관련이 없으니 논하지 않도록 하겠다.


표준어를 소리대로 쓴다. 한글은 표음문자니까 이것이 가능하다. 단, 어법상 심한 변화가 없도록, 즉, 갔다[가따] 갔으면[가쓰면] 갔지[가찌]를 발음대로 쓰지 않고 어느정도는 원래 형태를 유지하도록 쓴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느정도 합리적이다. 그런데 표준어 규정을 살펴보면 반대로 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규정항목이 있다. 즉, "(어원을 무시하고) 소리나는 대로 쓴게 표준어다"는 의미이다.

이쯤되면 뭔가.. 복잡한 상호작용이 보이기 시작한다. 표준어를 소리나는 대로 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읽다가 (혹은 말하다가) 조금씩 발음이 변한다. 그럼 그 발음을 표준어로 바꾸어서 표기할 때도 바꾸어 쓴다.

이 법칙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한글은 우리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훌륭한 표음문자이니까 이 명제가 유지되도록 표기법을 계속 바꾸겠다."

발음이 바뀐다고 짧은 기간 동안 표기를 자주 바꾸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한 예로, 영어의 r 묵음 현상 (/r/-dropping; air, car, dare 등에서 모음 뒤의 r이 발음나지 않는 것) 은 후기 근대의 일시적인 유행이었던 것이 정착된 거란다 (책에서는 추측형). 근대래봤자 1800년 쯤이니 영어는 200년 전에 바뀐 발음을 아직도 철자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영어 철자법에서 더이상 발음나지 않는 r 들을 모두 없앴다면? 혹은 나아가 발음이 바뀔 때마다 철자를 혁신적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마크 트웨인의 글을 읽어보자.

A Plan for the Improvement of English Spelling

For example, in Year 1 that useless letter "c" would be dropped to be replased either by "k" or "s", and likewise "x" would no longer be part of the alphabet. The only kase in which "c" would be retained would be the "ch" formation, which will be dealt with later. Year 2 might reform "w" spelling, so that "which" and "one" would take the same konsonant, wile Year 3 might well abolish "y" replasing it with "i" and Iear 4 might fiks the "g/j" anomali wonse and for all. 
Jenerally, then, the improvement would kontinue iear bai iear with Iear 5 doing awai with useless double konsonants, and Iears 6-12 or so modifaiing vowlz and the rimeining voist and unvoist konsonants. Bai Iear 15 or sou, it wud fainali bi posibl tu meik ius ov thi ridandant letez "c", "y" and "x" -- bai now jast a memori in the maindz ov ould doderez  -- tu riplais "ch","sh", and "th" rispektivli. 
Fainali, xen, aafte sam 20 iers ov orxogrefkl riform, wi wud hev a lojikl, kohirnt speling in ius xrewawt xe Ingliy-spiking werld.
- Mark Twain 

Wi wud hev a lojikl, kohirnt speling in ius xrewawt xe Ingliy-spiking werld.
(We would have a logical, coherent spelling in use throughout the English-speaking world.)
역사를 모두 따라가며 알고 있는 사람은 모든 글을 이해하겠지만, 이런 식의 역사는 잊혀지게 마련인바, 불과 1-200년이 지나지 않아 고문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표기를 자주 바꾸는 것의 문제는 첫째로는 방금 말했듯이 고전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나쁜 언어의 습관을 정당화시켜준다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나쁜 습관은 항상 좋은 습관을 물리친다. 그러나 노력한다면 이를 되돌릴 수 있다. 조지 오웰도 잘못된 습관에 의해 언어가 부패해 가더라도 (노력하면)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문: the decadence of our language is probably curable) 그는 주로 표현(어구)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발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미 우리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특성 중 하나인 모음조화를 상당수 잃어버렸다 (아름다와 등). 그리고 이것들은 맞춤법에서 확정함으로 말미암아 더이상 되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또한 많은 단어들이 어원과 관계없이 변하였기에 본래 뜻을 알지 못하게 되는 상황도 늘어났다. (강낭콩, 사글세) 어원을 무시는 경향은 여러 단어들을 조합하여 활용하는 언어의 발전이 멈추었고, 단어가 본래 무슨 뜻인지도 생각하지 않으며 남들이 쓰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행태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어의 창조적 활용이 점차 퇴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폐해를, 표기는 원래 형태를 계속 살리고 대신 옳은 발음을 지속적으로 교육함으로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대로 하는 게 옳은 발음'이라는 식의 표준어 규정은 '옳은 발음을 지속적으로 교육'할 명분과 열정을 잃어버리게 한다.

표기를 단어가 발음되는 것에 맞추어 자주 바꾸는 것에 장점도 물론 있다. 교육을 그리 받지 못한 사람들도 책이나 문서를 쉽사리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각나는 대로 써도 그것이 표준표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따라서 맞춤법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장점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국민 모두를 최소 9년을 정규교육의 틀에 가두어두는 교육 체계를 살펴볼 때 발음과 약간 떨어진 맞춤법이라도 이를 가르치는 것이 그리 어렵다고 보지 않는다. 더구나 후자와 같은 편의성이 사람들을 더 게으르게 만들어서 사전조차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자기 발음만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제멋대로의 표기가 범람하여 점점 나쁜 표기들을 늘린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어의 없다', '누가 그랬데?' 등이 있겠다.)

결국, 세대에 걸친 지식의 보존 및 전달이라는 측면에서의 표기법 보존과 현재 당장의 자유로운 읽기 및 쓰기를 위한 표기법 개정 중에서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인데.. 내가 결론내봐야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냐만, 나는 가능한 한 표기법 보존에 한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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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구상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이명박 까기 티셔츠'였다.
그 티셔츠의 문구(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투표권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문구 내용은 둘째치고,
"읍"을 강조한 의도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이 어디 방명록에 남긴 표기를 패러디 한거다)

나는 저 티셔츠를 만든 사람의 연령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데, 30살이 안되었을 것이다. 

"-읍니다" 규칙은 1988년에 표준어가 개정되면서 바뀌어 없어진 것 중 하나다. 
그전까지는 '-ㅂ니다'가 앞에 자음으로 끝나는 어간/어미를 만났을 때 'ㅡ' 모음을 더하는 규칙에 의해 '갔읍니다', '있읍니다' 등이 옳은 표현이었다. 허나 사람들이 '있', '갔'에서처럼 과거형 어미의 발음이 이어지는 것을 혼동하여 '좋읍니다' 등에서도 'ㅅ' 발음을 끼워넣기 시작하자 결국 표기법 개정안에서 '-습니다'를 옳은 것으로 '-읍니다'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했다. 내 기억에는 모든 '-읍니다'가 '-습니다'로 발음나는 것도 아니었고 일부 사람은 여전히 옳게 발음하고 있었는데도 표준어가 바뀌자 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발음은 '-습니다'로 바뀌어버렸다.

따라서 "읍니다" 표기로 다른 사람을 비웃으려면 이러한 사정을 몰라야 하고, 서른이 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난다. 혹 서른이 넘었다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사람일 수밖에 없다.. (즉 어릴적에 제대로 된 표기를 가르치는데 배우지 못했다?)

"-읍니다"->"-습니다" 규칙의 폐해는 다름아닌 용언의 명사형에서 드러난다.
현재 "읽읍니다"는 틀리고 "읽습니다"가 맞다. 
그렇다면 "읽음"이 맞나 "읽슴"이 맞나? 
"읽음"이 맞다. 명사형에 대한 규칙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곧 바뀔 것 같다. 맞춤법이 요상하게 바뀐 후 수많은 사람들이 명사형도 잘못 쓰기 시작했고, 틀리게 쓴 글들이 틀리게 읽히는 건 당연하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제대로된 교육없이 표기만 발음에 맞추어 개정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아름다움과 어울림은 사라지고 너덜너덜해진 우리말 뿐일 것이다.


  1. 행인 2008/10/25 07:10 답글수정삭제

    공감합니다.

  2. 궁시렁 2008/10/25 19:56 답글수정삭제

    Iear 4 까지는 뭐가 바뀌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네요. ㅎ

    • monomask 2008/10/25 20:39 수정삭제

      후후 저 마크 트웨인의 인용문 정말 재밌고 좋아하는 글이긴 한데, 유머로는 좋아도, 실제로 저렇게 적용한다고 생각해보면 그건 좀 낭패스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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