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나를 어릴 때부터 '착하다'라고 평했다.
대체로 조용하고 책을 좋아하는 성격에 부모님 속을 썩여 본 적도 없고
부모님 명을 거역해본 적도 별로 없고 반항심도 없는 그런 무난한 아이.
용돈을 올려달라거나 무언가를 사 달라고 크게 떼를 써본 기억도 거의 없는..
그러나 내가 나중에 커서 어머니와 어떤 대화를 하다가 말씀드린건데,
'나는 착했던 게 아녜요. 합리적이었던 거지. 수긍이 가니까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하고 그랬던 거지,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면 그렇지 못한다고요.'
나는 그 순간 착한 심성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돌이켜보면 자평한 대로 어릴 때도 이성적인 쪽이 발달한 편이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가.'하는 따위의 생각을 자주 하며 지내는 이상한 아이였다. (물론 직접 말한 적은 없다.)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감성적인 부분이 이성적인 부분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거야 말 그대로 착한 아이일 뿐이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착한 아이'의 반대가 뭘까. '반항아'인가? 그렇다면 착한 아이에 가깝다는 게 맞겠다.
문제(?)를 일으킨 일이 한번 있긴 한데 부모님은 모르신다.
중학교 수학선생님한테 겨우 한대 맞고 소극적 수업거부를 한 일이다.
자세한 건.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다. 그땐 아직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게 하루에 한번씩은 넘게 있는 일상사였는데 (내가 매일 맞았다는 얘긴 아니다), 손바닥도 맞고 머리도 맞고 종아리나 엉덩이도 맞았지만 뭐 잠깐 맞고 버티는 거지 그리 마음쓴 적은 없었다. (그땐 다들 그랬지)
근데 이 사건은 사뭇 달랐다.
중2 때였는데, 가을 쯤이었던 거 같다. 수업을 시작하며 수학 선생님이 두어가지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몇명 정도 대답을 못하니 계속 다른 학생에게 넘기며 질문을 한다. 내 차례에 왔을 때 나는 첫번째 것은 대답하고 두번째 것은 대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넌 둘다 알아야지. 손바닥 한대만 맞자'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표현을 쓰니
만화 정글고 수학선생이 생각나는군..) '아니 하나도 못 맞춘 딴 애들은 안 때리다가 저는 하난 맞췄는데 그러는 게 어딨어요'하고 버텼지만 결국 딱 한대 맞고야 말았다. 이
역차별(?)이 어찌나 억울했던지.. 그 학년 남은 기간 내내 선생님을 외면하고 묻는 말에도 대답 안하는 소극적 수업거부를 하고야 말았다.
이게..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닌데.. 이런 경우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하든지 오히려 화를 내든지 불러 타이르던지 했어야 할 거 같은데, 사실 수업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부르긴 했지만 당시 열받아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수업거부를 며칠 지속하다 보니 서로 먼저 그만두기가 뻘쭘한 지경에 이르러 결국 서로 외면하는 상태로 고착되어 학년을 넘기게 되었다. 수업을 외면하는 대신 나는 숙제를 안 하거나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선생님과 대면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학 과목에 꽤나 신경을 써야만 했다.
만약 선생님이 불합리했다고 인정했다면 금방 상황종료였을 테고, 오히려 불러서 윽박질렀다면 교무실에서 선생님에게 맞서 소리를 지르는 반항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텐데, 선생님은 더이상 아무 액션을 취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서로 서먹한 상태로 고착됐다. 차라리 내가 선생님과 동등한 관계였다면 항의를 하거나 혹은 열린 자세로 이유를 물어볼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않은 것은 누구나 알다시피한 것이므로 나는 수동적으로 선생님이 먼저 액션을 취하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반대로 '선생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을 테니 서로 외면하는 편하지만 마음 불편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소하지만 오래 지속된 사건은 약간 무심한 B형 타입의 나에게 당일을 제외하고는 (그기간에조차) 별로 감성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몇년이 지나고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서 '아 내가 왜그랬을까.. 선생님은 왜그랬을까..'하고 생각하곤 했다. 결국 합리적인 대우(해명/설명)를 원했던 시작이 서로 소득없는 대치를 지속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어낸 모순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에게 '착한 아이'도 아니고 '반항아'도 아닌 '다루기 어려운 아이'였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착한 아이란 '상대방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유약한 자, 혹은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생각 없는 자'일지도 모른다. 또한 반항아는 '주어진 불합리성을 견디지 못하는 철학자'일 수도 있다. 내가 반항아로도 가지 않았고 착한아이로도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더이상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다 더이상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원하지 않았고 좋게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시작은 합리성이었지만 나는 사태 해결의 의지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내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합리적 상태로 들어가지 못했다.
합리성에는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적극적 합리성, 소극적 합리성, 무례한 합리성.
각각은 개혁가, 투덜이, 반항아(이단아)를 만들어 낸다.
훌륭한 리더는 두말할 것 없이 적극적인 합리성을 지닌다. 그는 불합리성을 간파하고 타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주변 사람들을 잘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사람들을 이성적으로뿐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설득할 수 있는 타입이다. (당연히도) 흔히 보기는 어렵다.
불합리성과 합리성을 구분할 줄 알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투덜이로 남게 마련이다. 아무 사회적 영향을 주지 못하며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잘해봐야 여기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골치 아픈 경우가 마지막 경우인데, 분명히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동조해줄 수가 없다. 흔히 '계몽지식인', '진보지식인'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주장 자체가 비합리적인 '
자칭진보'들은 빼겠다). 오히려 역지지층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반대방향으로 밀어내기 일쑤다. 원래 그들은 첫째 부류에 속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얘기를 하고 보니 합리성이 착한아이와 반항아를 구분짓는 건 아닌 거 같다.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적극적이고 잘 대처하면 합리적인 착한아이가 될 수도 있고 무례하게 대처하면 합리적이어도 반항아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앞서 예를 든 수업거부 사태에서 투덜이였던 거다. 다른 몇몇 상황에선 적극적 합리성을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소극적 합리성으로 남아 있을 때도 있다. 최소한 무례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잘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